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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학의 전라도에서]
5·18 북한군 전사자 추모비의 함의
정재학 입력 2024-08-07 06:31:10
5·18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5·18에 북한이 개입했는가의 사실 여부를 밝히는 일이다. 만약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북한의 공작으로 5·18이 일어난 것이 사실이라면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은 당장 폐쇄되어야 하고 5·18은 영광이 아니라 치욕으로 남아야 한다.
나아가 5·18에 관련된 모든 것이 정당성을 상실할 것이고 5·18을 무기로 대한민국 정부를 겁박하고 죄의식을 강요하며 민주화유공자로 군림하던 그 모든 것들이 허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5·18 세력은 필사적으로 북한의 개입을 부정하고 있다. 고소·고발은 물론 온갖 위협과 겁박, 심지어 정치적인 힘까지 이용하여 사력을 다해 막고 있다. 그것이 몸부림처럼 느껴지는 것은 정당한 논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의문에 대한 합리적 논의를 거부한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총기 무장 폭력에 대한 지나친 찬양과 묵인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교도소 습격의 반역성에 대한 논란이 일자 그들은 혁명의 시기엔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논란 자체를 무시했다. 46곳이나 되는 무기고 탈취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자 그들은 무기고를 탈취한 한두 사람을 내세워 자기들이 한 일이라고 자랑했다. 그러나 무기고 탈취는 한두 사람이 46곳에서 일시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무기고는 총과 총탄이 따로 관리되는 곳이다. 그럼에도 46곳에서 총과 총탄이 한두 사람에 의해 한꺼번에 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들이 약탈한 무기 속에는 수류탄도 있고 기관총도 있었다.
총기를 반납하자는 광주 유지들의 설득에 끝까지 반대하고 총기를 들었던 자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도 있었지만 5·18 세력은 그들의 정체를 묻어 버린 채 오로지 강렬한 의지를 지닌 민주화유공자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필자가 아는 한 총기 무장투쟁이 반역 행위라는 점을 광주 유지들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5·18 개입 여론을 막기 위해 5·18 세력은 김일성의 발표문을 내세워 북한이 5·18에 관여하지 않았음을 주장했다. 믿을 수 없는 김일성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로 한 결과였다. 김일성을 신뢰하는 자 아니면 이 또한 이해가 불가한 일이었다.
김일성은 5·18에 관련해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는 5·18에 관여하지 않았다. 미군이 남조선에 주둔하고 있는데 우리가 어찌 군대를 보낼 수 있겠는가. 만약 우리가 군대를 보냈다면 전쟁을 각오한 짓이다.”
그러나 이 말을 분석해 보면 김일성의 5·18 개입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는 말을 반복했을 뿐이다.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는 말은 정규군을 보내지 않았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다. 김일성은 남한 내 남로당 계열의 제5열들과 특수부대 남파에 대한 말은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규군만 보내지 않은 것이고, 간첩 남파와 특수부대와 남로당 불순세력의 정체에 대해서는 함구한 것이다.
김일성의 이 말이 거짓임은 5·18 당시의 거리 광경을 현장 상황으로 평양과 전 북한에 실시간으로 방영한 사실이 증명해 준다. 당시 광주에서 북으로 보낸 수많은 전파교신이 있었다는 점과 총격이 빗발치는 실제 장면을 촬영하여 보낸 자들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북한 특수군이 어떤 존재들인지 우리가 모를 까닭이 없다. 그들은 간첩 침투를 전문으로 하는 자들이며 일반 군대처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북한은 정찰총국·보위부·통일전선부 등에서 수많은 특수부대를 운용하고 있다. 모두 일반인처럼 머리 기르고 남한 말을 쓰도록 훈련된 특수한 자들이다. 김일성이 이 자들의 정체까지 밝힐 까닭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김영삼정부 이전까지 비전향장기수 사상범들은 매일 아침 교도소에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였다. 따라서 남로당 계열의 제5열들이 5·18을 가만 놔두고 봤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김일성은 이들의 존재를 1980년 6월19일에 낱낱이 밝힌 바 있다. 그 기록물이 추모비 형태로 함경북도 청진역 북방 800m·낙타산 중턱 70m에 위치해 있었다.
◈ 5·18 광주 침투 북한특수군 534군부대 전사자 추모비(여군 포함 154명)
비석에 새긴 첫문장 : “여기에 청춘의 고귀한 심명을 당과 조국과 인민을 위해 바친 님일세”
비명(碑銘) : “사람들이여! 걸음을 멈추고 용사들의 불멸의 애국정신을 추억하라. 피로써 조국을 지킨 인민군 영웅 렬사들의 혁명 정신과 찬란한 위훈은 후손 만대에 길이 빛나리라!”
추모비에 새겨진 사람들의 사망일은 모두 1980년 6월19일이며 5·18이 끝난 후 6월19일까지 돌아오지 않은 자들로 추정된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순서대로 일부만 발췌하여 싣는다).
홍성표·김석준·한창준·오부진·김운선·김응수·김국식·김한수·서대석·우준선·조영규(이하 생략).
5·18 세력은 이 추모비를 조작이라 강변하나 북한이 어떤 곳인데 이런 추모비까지 가짜를 세우겠는가. 중국한테도 자주를 강조하며 고개조차 숙이지 않는 사람들이 가짜 추모비를 세운다? 조금이라도 비위 상하면 남북연락사무소도 폭파하고 개성공단도 폐쇄하는 곳이 북한이고 백두혈통 아니던가. 그런 사람들이 가짜를 만들어 떠받든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600명 북한특수군 남파설은 신빙성과 함께 강렬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뿐 만이 아니다. 과거 김일성은 ‘김대중 남조선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한 바 있다. 70년대 초 20만 달러 공작금뿐만 아니라 조총련을 비롯하여 수많은 간첩을 보내 돈과 인력을 보충해 줬다. 당시 20만 달러는 현재 가치로는 수천만 달러에 해당한다.
김대중을 향한 북한의 공작이 정체를 드러낸 때가 있었다. 김대중은 대통령 당선 즉시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을 만났다. 세계가 놀란 사건이었으나 둘은 비밀스럽게 김정일의 차 안에서 한참동안 대화를 나눴다. 김정일의 차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미국이 정보 자산을 총동원하여 알아낸 바로는 김정일이 내민 것은 북한이 김대중을 위해 보내준 돈과 인력에 대한 자료였다. 그때 김대중은 김정일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5억 달러에 가까운 돈이 김정일에게 지원된 것은 그 직후부터였다. 그리고 5·18은 민주화운동이 되었다.
5·18 세력이 입이 백 개 있어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윤기권의 월북이다. 윤기권은 5·18 당시 조선대부속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윤기권이 자랑스럽게 밝힌 기록에는 산수오거리에서 경찰 5명을 몽둥이로 두들겨 팬 사실이 있었다. 바로 이 사실을 근거로 그는 5·18 유공자가 되었고, 1990년대 말경에 보상금 2억 원을 받았다. 당시 그 돈은 아파트 서너 채 값이었고 현재 화폐가치로 수십억으로 추산된다. 몰려다니며 경찰서 습격하고, 질서 잡기에 나선 아버지뻘 경찰을 패고 두들겨서 무릎 꿇린 그 행위가 민주화운동이었고, 2억 원의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윤기권은 보상금을 받고 월북했다. 윤기권의 월북에도 북한의 손길이 닿아 있었음이 느껴진다. 북한은 선전용으로 사용할, 실제 5·18에 기담한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윤기권은 남파 간첩들의 인도를 받아 북으로 넘어갔다.
5·18은 북한의 대남 선전선동 전략에 가장 가치있는 주요 재료로 쓰여 왔다. 5·18이 역사 속에 묻히지 않고 자꾸 망령처럼 살아 움직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한이 중단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18에 기생해서 나랏돈 뜯어먹고 사는 가짜 유공자들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5·18은 대한민국 주사파 양성과 반정부운동의 산실이자 반역의 논리적 근거가 되었고, 더불어민주당의 입법 폭력과 대통령 탄핵을 위한 든든한 정치적 배경이 되고 있다.
그동안 북한은 끝없이 5·18을 이용해서 수많은 주사파를 생산하고 남로당의 후예를 키우며 무수한 5·18 관련 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심어 왔다. 그리하여 5·18은 북한에 가장 우호적인 반역단체가 되었다. 또한 좌익 세력은 5·18을 반정부·반국가 투쟁의 구심점으로 활용하고 있기에 우리는 5·18 정신 자체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주사파 대부 ‘강철 서신’의 김영환이 주사파가 된 것도 5·18 관련 사진들을 보고 분노한 까닭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강화도에서 북한 간첩의 안내를 받아 잠수함을 타고 북으로 갔다. 그리고 두 번이나 김일성을 만났다.
그때 김일성이 한 말이 “그동안 수많은 간첩을 보내고, 수많은 공을 들여 남한 내 혁명을 선동했으나 그러나 이루지 못한 일을 대학생 김영환이 해냈다”는 것이었다.
그 주사파의 일부가 이석기의 경기동부연합이었고 통합진보당이었으며 현재의 진보당이다. 그리고 범민련 중심의 남로당 세력과 주사파 세력이 장악한 곳이 더불어민주당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당 이름 자체가 문제가 된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당 이름을 따와서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민주당이 입에 달고 사는 ‘처음처럼’도 문제가 된다. 주사파들은 과거 북한이 처한 ‘고난의 행군’ 이후 흩어지는 붉은 세력을 모으기 위해 ‘처음처럼 김일성을 모시자’는 구호를 외친 바 있다.
그 ‘처음처럼’이 통혁당 출신으로 20년형을 살았던 간첩 신영복에 의해 글자로 서각되고, 이 글씨는 문재인 통치 시절 국정원 정문 비석으로 세워져 대한민국 정보사를 지배하고 있었다. 한때 경찰청사 현판에도 새겨질 뻔하다가 중단된 바 있다. 이후 이 ‘처음처럼’은 더욱 발전하여 민주당 국회의원 모임으로 ‘처럼회’가 조직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이 김일성을 모시는 주구(走狗)가 된 것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에 일어났던 모든 분란과 소위 민주화운동에 대해 필자는 북한의 작용을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실임을 확인한 바 있다. 심지어 4·19 의거에도 북한은 있었다. 김일성은 살아 생전에 4·19 때 남한으로 쳐들어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 바 있다.
자유민주당 고영주 대표의 주장처럼 정말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은 99.9%가 가짜일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정점에 5·18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북한은 5·18 북한군 전사자 추모비를 통해 5·18이 북한의 공작이었음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무려 154명이나 되는 북한군 전사자를 통해서 북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 대한 비열한 조롱(嘲弄)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5·18은 북한 김일성의 대남공작 중 하나였으며 김대중과 북한을 추종하는 불순세력들이 가세한 ‘사건(事件)’이라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남 함평 출신 이영일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 전 의원이 지적한 ‘내란형 폭동’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 청진에 있던 5·18 북한군 전사자 추모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당과 수령의 명령으로 남조선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혁명전사의 이름으로 이곳에 묻혔다. 우리의 죽음을 누구 맘대로 민주화운동으로 부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