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은 위대한 대한민국 영도자였다
Ⅲ. 북한의 도발과 국난극복
우리 정치사에서 전두환의 등장은 정말 운명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께서 서거하고 난 뒤,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대처한 이가 전두환이었다. 보안사령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범인 김재규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김재규 체포 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대통령직에 오른 최규하. 그러나 전두환은 최규하가 김재규가 범인임을 알면서도 무려 4시간이나 침묵을 지킨 점을 주목한다. 김재규와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에 전두환은 신현확 전(前) 총리를 찾아가 대통령직 수행을 요청하였고, 이 제안을 신현확 씨는 거절한다.
결국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스스로 정권을 잡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12월 12일에 있었던 12.12 사태이다. 전두환은 처음부터 정권을 잡고자 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를 안 즉시 당시 영부인 직을 수행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남긴 말또한 전두환의 뜻과 다르지 않았다. 박근혜가 남긴 말은 북한의 도발을 걱정한 ‘전방(前房)은요?“였다. 부친의 사망보다 국가 안보를 먼저 생각한 발언이었다.
전두환 역시 국내 혼란을 극복하고 북한의 도발과 침투를 막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했다. 최규하는 믿을 수 없고, 신현확 씨는 거절하는 상황.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과 김대중 씨에게 정권을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양(兩) 김 씨가 보여준, 경부고속도로 반대부터 사상적 행보까지, 전두환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그리하여 전두환이 우리 정치사에 등장한 것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나라를 맡자’는 것이었으니, 전두환과 신군부의 등장에 서려있는 내면의 진실까지 흉측한 내란음모로 처단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정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유럽 의회 관계자들이 전두환 전(前)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한 첫째 이유가 바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이었다. 바로 이 점은 전두환에 대한 진실 중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안정보장상의 이유란 북한의 도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수없이 자행된 북한의 도발에 대해, 군사적으로 응징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했음을 의미한다. 전두환의 7년 치적 행간(行間) 속에서 두고두고 곱씹어 볼 만한 부분이다.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던가.
북한을 빼놓고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설명할 수 없다. 모든 반(反)대한민국 시위나 집회 역시 북한을 제외하고는 설명이 안 된다. 5만 간첩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 간첩들이 무엇을 획책하고 선동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일 수 없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북한의 무력도발과 간첩 테러를 정면으로 맞서 싸워왔다. 박정희 대통령과 전두환 시대 역시 북한과 대결 속에서 온갖 도발과 간난과 신고의 과정을 겪으며 이루어낸 성과물이었다.
한 손으로는 맞서 싸워야 하고, 한 손으로는 경제를 일으켜야 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한민국의 경제적 부흥은 북한이라는 적과 싸우면서 일으킨 위대한 업적이라는 점이다. 북한이 우리 대한민국에 자행한 도발은 1953년 휴전 이후 무려 40만 건이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두환 시대의 배경 속 1970-1980년 대 일어난 북한의 도발을 시간의 흐름대로 간추려 본다, 조금만 살펴보아도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었는지, 우리 대한민국의 어떤 국난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은 1970년부터는 화전양면전술을 본격적으로 사용해, 불리한 상황에서는 대화를 주선하는 한편 비무장지대를 은밀히 침투할 수 있는 땅굴을 굴착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유리한 상황에서 반드시 무력을 동원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70년 이후에 발생한 북한의 도발을 대표적인 것만 추려본다.
•해군 방송선 I-2 피랍 사건(1970.6.5) [6]
•현충문 폭파 미수 사건(1970. 6. 22)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1971. 1. 23)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1971. 6. 1)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사건(1973 .03. 07)[7]
•추자도 무장공비 침투사건(1974. 5. 20)
•해경 863경비함 격침 사건(1974. 6. 28)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1974. 8. 15) - 육영수 여사 서거
•휴전선 남침용 땅굴 발견 사건(1974. 11. 5 등 1990년까지 총 4차례)
•헨더슨 소령 사건(1975. 6. 30)
•판문점 도끼만행사건(1976. 8. 18)
•광천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1978. 11. 4)
•최은희·신상옥 납치사건(1978. 1. 14, 1978. 7. 19 순차적으로 납치)
전두환 집권 1980년대에는 주로 테러를 이용한 도발을 시행했는데, 범위를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제3국에서 실행해 테러의 주체를 알지 못하게 위장하려고까지 했다.
•필승교 무장공비 침투사건(1981. 6. 29.)
•SR-71 정찰기 피격 사건(1981. 8. 26.)
•저진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1982. 5. 15.)
•임월교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 6. 19.)
•월성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 8. 4.)
•독도 근해 간첩선 격침 사건(1983. 8. 13.)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1983. 10. 9)
•다대포 침투 무장공비 매복 생포 작전(1983. 12. 3.)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 사건(폭탄 투척 사건)(1983. 9. 22.) - 체포된 공비 진충남과 이상규의 증언에 따른 발표.
•청사포 간첩선 격침 사건(1985. 10. 19.)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1986. 9. 14.)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1987. 11. 29)
이 중에서 김포국제공항 폭탄 테러와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은 86아시안게임과 서울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일으킨 테러였다.
특히 아웅산 테러는 북한 테러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버마(현재의 미얀마)의 수도 랭군(현재의 양곤)의 아웅산묘소에서 한국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북한공작원에 의해 저질러진 폭파사건으로, 1983년 10월 9일에 발생했으며, 이 사고로 대통령 공식 수행원과 수행 보도진 17명이 사망하고, 1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한 현장에 있던 미얀마인 3명도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묘소에 도착하기 전이어서 위기를 모면했다. 나라를 일으킬 유능한 인재들은 이렇게 북한의 테러에 의해 꿈을 접고 산화(散華)하였다.
희생된 17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석준(徐錫俊), 외무부장관 이범석(李範錫), 상공부장관 김동휘(金東輝), 동자부장관 서상철(徐相喆),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咸秉春),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심상우(沈相宇),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 김재익(金在益), 재무부차관 이기욱(李基旭), 주 버마대사 이계철(李啓哲),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하동선(河東善), 대통령 주치의 민병석(閔炳奭), 농수산부차관 강인희(姜仁熙), 과학기술처차관 김용한(金容澣),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재관(李載寬) 등의 공식 수행원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동아일보 기자 이중현(李重鉉), 경호원 한경희, 정태진 등도 사망하였다.
부상자는 합참의장 이기백(李基百), 공보비서관 최재욱(崔在旭), 외무부 의전국장 최상덕(崔尙德), 한국일보 기자 윤국병(尹國炳), 중앙일보 기자 송진혁(宋鎭赫), 동아일보 기자 최규철(崔圭徹), 연합통신 기자 김기성(金基成), 코리아헤랄드 기자 김기석(金基石), 연합통신 사진부장 최금영(崔琴煐), 문화공보부 직원 임삼택(林三澤)·김상영(金相榮), 경호원 김상태 등이었다.
김포공항 폭탄 테러 사건은 1986년 9월 14일 김포국제공항 청사 앞에서 의문의 폭발물이 폭발하여 5명이 사망하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서울 아시안 게임 개막을 5일 앞두고 발생하였다. 아시안 게임을 방해하려는 북한의 테러였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Korean Air Flight 858 Bombing)은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출발한 대한항공 858편(KE858)이,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해역 상공에서 대한항공 보잉 707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작원 김승일과 김현희에 의해 공중 폭파되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였고,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여객기 폭파 후, 두 폭파범은 1987년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조사를 받던 중 김승일은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으며, 김현희는 대한민국으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일으킨 최대의 항공 테러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2008년 9월까지 미국의 테러 지원국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이외에도 북한은 끊임없이 간첩과 무장공비를 남파시켰고, 반(反) 대한민국 활동 및 반(反) 정부활동을 진행시켜왔다. 전두환은 이런 국난을 딛고, 북한과 맞서 싸우는 한편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도약 발전시킨 것이다.
2024. 11. 14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